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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분을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지금도 잘 안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근 2년 동안 한명숙 전 총리님을 옆에서 지켜 봐왔지만 아직도 온전히 그 분을 알 수 없었다. 그 분은 나의 상상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뿌리를 가진 거목이기 때문이었다.

처음 그 분을 만나게 된 것은 2008년 18대 총선 때였다. 한명숙 총리가 나를 찾았다. 18대 총선을 준비하던 당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해 온 것이다. 평소부터 존경해 오던 터라 단 1분도 고민하지 않고 흔쾌히 도와드리기로 결정했다. 나는 한명숙 총선 캠프의 선대본부장 맡아 선거를 지휘했다. 하지만 너무도 낮은 투표율로 인해 패배하고 말았다.

최상의 후보를 앞세우고도 선거에 패배한 것은 모두 내 탓이었다. 모든 언론과 자체 조사에서까지 거의 10%에 가깝게 승리를 예상했지만 낮은 투표율에 결국 발목이 잡혔다. 야당의 지지자는 기권했고 여당의 지지자는 투표장으로 몰려들었다. 선거에서는 승리했지만 투표에서 지고 만 것이다.

결코 그 패배의 저녁을 잊지 못한다. 내가 살아 온 삶의 기억 중 가장 부끄럽고 죄스러운 날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분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울먹이는 캠프 식구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주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그 처절한 패배의 순간에서도 단 한마디의 원망도 성냄도 없이 모든 것을 당신의 탓으로만 돌렸다. 비마저 추적이던 그 밤, 댁으로 돌아가시던 그 좁은 어깨 사이로 저는 산처럼 커다란 거인의 모습을 보았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한명숙 총리님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일산동구 지역위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한명숙 총리님을 모시는 자발적 참모가 되었다.

고양시장에 출사표를 던지며 내 인생을 뒤돌아보니 결코 쉽지 않은 삶을 살아온 것 같다.

하지만 삶의 고비고비마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쪽을 선택해 왔다. 그리고 내가 옳다고 믿는 쪽은 거의 대부분 현실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다. 난 지금 다시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했다.

기실 이 어려운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도 나를 대신할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비겁한 회피였을지도 모른다. 주위 나를 믿고 지켜봐주는 듬직한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지금의 자리까지 함께 해준 소중한 선후배님들 난 이들에게 갚을 수 없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들은 내가 힘들 때 나를 토닥여 주고 때로는 냉정하게 꾸짖어주었다. 이 분들이 함께 해오지 않았다면 난 결코 이 힘든 싸움을 시작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순 없다. 때로는 내가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 그것은 역사의 부름이며 그 앞에 순응해야할 의무가 나에겐 있다. 나는 많은 약속을 할 수가 없다. 단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소박하지만, 작지만,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시작할 것이다. 이름 얻기 보다는 마음을 얻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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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혁이 이병진이 되는데 채 20년이 필요하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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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치인 노무현을 알게 된 것은 대통령 후보가 되기 훨씬 이전이다. 절친한 내 친구가 국회의원 노무현의 보좌관이었다. 친구를 통해 노무현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고백하거니와 첫인상은 별로 좋질 못했다.


너무 원칙주의자라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겸손했지만 달변이라 말을 물어보기가 겁날 지경이었다. 한 번 말을 꺼내면 열정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조금씩 지나면서 노무현의 참 진가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노무현은 어디 주머니에 넣어도 결국 삐져나올 예리한 송곳이었다. 나는 점점 인간 노무현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16대 대선 경선이 시작되었다. 당시 이인제 대세론이 당을 장악하고 있었다. 많은 정치인들이 이인제에게 줄을 서고 있었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기꺼이 노무현을 선택하고 그의 캠프에 들어갔다. 설령 노무현이 후보가 못 된다 하더라도 나는 그의 정치적 역정을 믿었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 정치사를 새롭게 바꿀 인물이라고 확신했다.





노무현 후보는 어렵게 대선후보가 되었지만 후보 자리를 지키기는 더 어려웠다. 당 안팎에서 그를 흔들어 대고 있었다. 결국 정몽준과 단일화를 통해 16대 대통령이 되었다. 감격스러웠다. 김대중 대통령님이 정권교체로 민주화의 틀을 열었다면 노무현 대통령님은 민주정부의 완성을 만들어 내리라 믿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수구의 반격은 매서웠으며 민주세력 역시 갈갈이 찢겨 분열되고 말았다.


참여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나는 중소기업중앙회 상임감사로 임명되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중소기업의 육성과 보호 그리고 중소기업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경제단체였다. 나는 상임감사로 근무하면서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의 애로사항을 현장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대화와 토론을 통해 중소기업 활성화 방안을 찾았다. 내겐 참으로 값지고 귀한 시간이었다. 4년간의 중소시업중앙회 상임감사의 경험은 내게 실물경제를 통찰하는 능력과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어느덧 참여정부가 지났다. 나는 여전히 중소기업중앙회 감사로 재직 중이었다. 내 임기는 2년이 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표를 제출했다. 대통령과 진퇴를 함께하는 것이 정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때 나를 찾아 온 또 다른 정치 거인이 있었다.


[8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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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난 극단 후배 김영순과 결혼했다. 서른 네 살의 만혼이었다. 결혼 후 과천에 작은 전세방을 얻었다. 아내와 난 가난하지만 행복했다. 당시 난 친구와 함께 ‘이브닝서울’이라는 정보지를 만들었다. 국내 최초의 식당가를 알리는 정보지였다. ‘이브닝서울’은 당시에는 획기적으로 천리안 통신에 동시에 게재되었다. 지금으로 친다면 홈페이지와 인터넷 언론이 복합된 것이었다. 당시에는 정보를 팔고 산다는 것이 어색할 때였다. 업계에서는 신선한 발상으로 우리를 주목하고는 했었다. 그 때 나는 문화운동을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현실로 돌아 올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은 87년 이후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 기실 우리는 운동의 방향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눈에 보이던 적들이 표면적으로 사라지자 운동의 핵심이었던 민중의 관심이 소홀해진 까닭이었다. 큰 아이가 출생하자 나의 고민은 더 깊어졌다. 우선적으로 시급한 것이 먹고 사는 문제였다.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고 책임져야할 아내와 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아내와 난 의논 끝에 신정동에 작은 속셈학원을 차렸다. 동네학원 치고는 학생들이 제법 붙어 생계에는 큰 걱정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92년 대선이 시작되었다.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김대중 후보와 김영삼 후보가 맞붙었다. 하지만 87년처럼 분열적인 상황이 아니라 적과 동지가 또렷하게 구분되고 있었다. 김영삼은 끝내 3당 야합을 통해 민자당의 후보가 되어 있던 터였다.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행위였으며 민주세력의 분열을 만들고 고착시켰다. 또한 호남을 고립시키는 분열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나는 당시 부정선거감시단이 되어서 민자당 김영삼 후보의 부정을 감시했다. 천문학적인 선거 자금이 풀어졌고 여당의 프리미엄을 등에 업은 김영삼의 물량 공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나는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우리는 패배했고 3당 야합을 등에 업은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이 말도 안 되는 한심한 역사를 되돌려야만 했다. 내가 이 커다란 역사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난 몇 달 동안 고민, 고민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민주주의의 근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나부터서 지역으로 내려가 풀뿌리 민주주의부터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 고민 끝에 아내와 나는 그 시작을 고양시로 정했다.

고양시는 신도시였으므로 지방 토호의 힘이 약할 것이라 판단했다. 새로운 공동체와 문화를 통한 그루터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신도시가 가장 적합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나는 아내와 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고양시에 정착했다. 장기적 안목으로 지역운동부터 차근차근해나갈 심산이었다. 시민활동 단체인 ‘열린고양자치연구소’의 부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지방자치와 고양시의 발전을 연구했다. 그리고 ‘일산 21세기 신문사’의 편집위원으로 기고를 통해 고양시의 문제점과 해결 방안을 하나하나 짚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서서히 지역 운동가가 되어 있었다.



그런 내가 정치권으로 뛰어 든 결정적인 계기가 15대 대통령선거였다. 나는 고양시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헌신했다. 그리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정권교체를 달성했다. 승리가 확정된 날 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정권교체가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기꺼이 민주정부에 참여하기로 했다. 어떻게 이룬 정권 교체인데 기필코 성공해야만 했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나는 지방선거에 출마하여 경기도 도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새정치국민회의 고양시 일산구 지구당위원장을 대행하면서 현실 정치에 눈 뜨기 시작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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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 후 내 삶의 목표는 확실해 졌다. 나는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문화운동을 선택했다. 막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결성되고 있었다. 난 적극 참여했다. 그 후 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 결성되자 실무 간사를 맡았다. 난 문화운동 중에서도 민족극연구회를 맡아 연극을 통한 민주화 사업을 이끌어 갔다. 배고픈 시절이었다. 차비가 없어 눈치를 보며 용돈을 타야할 시절이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믿음으로 그 따위 어려움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늘 배가 고팠지만 마음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희열로 뿌듯했다.

1985년 복학이 허가되었다. 그리고 86년, 입학 8년 만에 졸업했다. 집에서는 취직을 하기를 원하는 눈치였지만 내 고집을 아는 터라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취직이 가능했다. 하지만 난 문화운동을 선택했다. 그해 문화부 장관을 했던 김명곤 선배가 극단 아리랑을 창단했다. 난 단원이 되었다. 극단 아리랑은 민족극 계열의 극문화 운동을 주도했다. 나는 배우로서 그리고 이론가로 활동했다. 극단 아리랑은 ‘갑오세 가보세’라는 작품으로 제 1회 민족극 한마당에 참여했다. 나는 총괄기획보를 맡았다.



유신독재시절에서 87년 6월 항쟁까지 우리나라 민주화 운동사에서 마당극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마당극 운동은 유신독재체제 아래 의문 속에 감춰져 버린 사건들의 진실을 밝히는 작업과 신랄한 세태 풍자, 억압받는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문화운동의 선두주자로는 물론 민주화운동의 큰 역할을 담당해 왔다.

이렇게 마당극 운동을 통해 이 땅의 민주화를 이끌어 온 극단과 놀이패들이 모여 1988년 제 1회 민족극 한마당을 펼친 것이다. 민족극한마당은 마당극운동 ‘진영’이 제도권에 등장한 첫 행사였다.

작품 ‘갑오세 가보세’는 19세기 후반 봉건지배 질서의 급격한 동요와 외세의 침탈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외세를 물리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우고자 민중이 스스로 일어난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갑오농민전쟁)을 소재로 삼고 있다. 이 연극을 통해 난 후배 김영순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결국 내 아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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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서울대 총연극반 회장이 되었다. 서울대는 총연극회는 당시 한국 문화운동을 이끌어 가던 실질적 본산지였다. 4학년이 된 나는 서울대 연극반의 공연을 준비 중에 있었다. ‘한 줌의 흙’이라는 작품에서 난 연출을 맡았다. 독회를 끝내고 점점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처음 맡는 연출이라 가슴도 설레고 각오도 대단했다. 밤을 새워가며 작품을 분석하고 극의 흐름을 짰다. 그 때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학내 시위를 준비하자는 것이었다. 난 그 의미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시위의 주동은 체포를 의미했다. 체포될 줄 뻔히 알면서 우리는 시위를 주도해야만 했다. 우선 연극반에서 연출을 사퇴했다. 내 첫 연출 작품이 ‘한 줌의 흙’으로 변해버렸다. 친구와 몇몇이 전단을 만들고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 당시는 학내 시위라고 해도 학생들이 한데 모여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몇 몇의 시위대가 학교에서 전단지를 뿌리고 우리의 의견을 낭독하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해 보이는 시위조차 구속을 각오하고 해야만 했다. 학교에는 사복 경찰들이 깔려 있었으며 학내에서 체포되는 건 다반사였다. 우리가 전단지를 뿌리고 전단의 내용을 읽는다는 건 그 자리에서 바로 체포된다는 뜻이었다.


특히, 전단의 내용을 낭독하는 하는 사람은 현장 체포를 감수해야 했다. 낭독을 하려면 미처 도망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난 내가 선봉에 서기로 했다. 연극반 출신이니 낭독도 훨씬 잘한다고 우겼다. 스스로 체포되기 위해 친구들을 설득한 것이다.


문제는 낭독자가 우리의 의견을 낭독하기도 전에 체포되어 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때문에 우린 좀 더 시간을 끌며 체포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늦게 체포될수록 학생들에게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만큼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좀 더 늦게 체포되는 방법을 찾아야만했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것이 도서관 창 밖 벽에 매달리는 일이었다. 밧줄을 타고 벽에 매달려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다.


드디어 거사 날이 돌아왔다. 친구와 나는 도서관 7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창으로 가서 라지에이터에 밧줄을 걸었다. 우리 둘은 창가에 서서 온 몸에 밧줄을 묶은 채 6층 난간 벽에 매달렸다. 들고 온 전단지를 뿌렸다. 전단지는 바람에 날려 마치 폭포수처럼 아래로 흩어져 날렸다.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독재타도, 민주쟁취. 전두환은 물러가라!”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도서관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전단지를 주워 든 학생들이 박수를 치며 우리에게 동조하기 시작했다. 나는 학우에게 드리는 글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모든 학생들이 숙연해 졌다. 내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발 아래는 떨어지면 생명이 위태로운 낭떠러지이다. 벽에 매달린 채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호소하고 있었다. 그 때 아래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새끼 잡아!”


드디어 경찰들이 나타 난 것이다. 순식간에 도서관 6층으로 올라 온 경찰들은 우리를 끌어내려 했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여기에서 떨어지면 우린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은 목숨이 아깝지 않았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한 알 밀알이라도 될 수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고 싶었다. 목숨을 건 우리의 저항이 계속되자 경찰들은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기 시작했다. 목이 쉬도록 외쳤다.


“독재타도, 민주쟁취”


하지만 우리를 압박해 오는 경찰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결국 나와 친구는 경찰에 체포되었다. 우리를 잡자마자 “독한 새끼들”이라는 말과 함께 무차별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우리는 피하지도 못한 채 온몸으로 고스란히 뭇매를 받아내고 있었다. 옷이 찢기고 입에서는 피가 흘렀다. 팔이 비틀리고 머리채는 잡혀 고개는 꺾여 졌지만 나는 죽을 힘을 다해 소리쳤다.


“학우들이여 일어납시다.”


“민주주의 만세, 민주주의 만세”


친구와 난 관악 경찰서 넘겨지고 조사를 받은 영등포 구치소에 구치되었다. 나는 집시법 위반으로 82년 6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


형이 확정되고 난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미 교도소 안에는 많은 민주화 정치범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바로 내가 있던 앞방에는 문익환 목사님이 수감 중에 있었다. 감옥에서 조차 여유를 잃지 않으시던 문 목사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연로하신 연세에도 불구하고 그 선한 눈매로 얼굴에는 환한 웃음을 담으신 채 감옥 생활을 묵묵히 이겨내고 계셨다. 운동시간에 인사를 드리면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운 얼굴로 손을 잡아주셨다. 난 수감 중에도 교도소내 투쟁을 선동한 벌로 에누리 없이 1년 6개월을 꼬박 다 살고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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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연극반 출신, 극단 아리랑 창단멤버 문병옥 고양시장 예비후보. 연극뿐아니라 영화배우로도 활동한 내역을 어렵게 찾아냈습니다. 이순재,여운계, 명계남 등 쟁쟁한 배우들 속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열연하는 문배우를 감상해보시죠.



영화 '모두들, 괜찮아요?' (2005) / 남선호 감독
  김유선 주연 / 이순재,여운계,명계남,
문병옥 등 출연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문배우를 발견하지 못한 순발력 없으신 분들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캡쳐1. 명계남 명배우와 마주앉아 식사하는 연기중인 문배우 (화면 왼쪽입니다.)





캡쳐2. 극중 큰사위 답게 여유있는 웃음으로 표정연기를 펼치고 있는 문배우



캡쳐3. 드디어 액션 돌입!  서서히 일어날 타이밍을 살피는 문배우




캡쳐4. 동물적인 타이밍을 잡은 문배우. 일어나는 연기 중




마지막 인증샷. 엔딩크레딧입니다. '큰사위 문병옥' 보이시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배우가 밝히는 캐스팅 비화.

후배 감독이 어렵게 입봉작을 찍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그를 돕기위해 명계남 명배우가 노개런티로 우정출연을 결심하면서, 지인 '연기파' 선배들을 물색하여 함께 우정출연을 하게 되었다는..  
자연스레 '연기파' 문배우도 불려나가 술 한잔으로 개런티를 대신하고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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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고등학생이 되었다. 난 동성고등학교에 배정 받았다. 동성고등학교는 내가 살던 집에서 무척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고교시절 길을 걷다 난데없는 돌부리에 채이듯 사소한 일들을 제외하고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 무렵 형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 우리 집 살림살이는 눈에 띄게 나아졌다. 나는  그저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 좋아하는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 뛰어나게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걱정스러울 만큼 공부를 못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목표는 꼭 서울대를 가는 것이었다. 위로 형과 누나들이 이미 서울대를 다니고 있어 서울대는 우리 집안에서 그리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3년 내내 공부에 매달리지 않은 성적으로 서울대를 가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재수를 했다. 열심히 공부했다. 잠을 줄여가며 공부했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기어이 서울대에 입학했다.



연극반 가입은 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연극반에 가입하고 보니 연극반은 소위 말해 운동권의 집합소와 같았다. 특히 서울대는 연극을 통해 한국사회가 가진 정치적 모순을 풍자하고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나름대로 반골기질이 강했던 내가 연극반의 그런 분위기에 빠져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난 학생극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와 동시에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난 학생운동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나는 연극반의 막내 배우가 되었다. 대사 몇 줄 안 되는 단역이었지만 연극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대학 2학년 말, 박정희가 죽었다. 우리는 이 땅에 금방이라도 민주주의가 올 줄 알았다. 모두들 갑자기 닥친 80년의 봄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라는 민주주의는 오지 않고 또 다른 군사독재가 탄생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오월 기어이 광주학살이 벌어지더니 종국에 전두환 정권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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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출판기념회때 상영했던 동영상입니다. 출판기념회때 이 동영상을 보신 분들께 반응이 좋아서 블로그에도 올려봅니다. 참
, 이 동영상은 '나까PD'님께서 저를 무려 5일 동안이나 스토킹(!!)하며 촬영해 만들어주신것이고, '불의검'님께서는 택시타고 달려오셔서 아리따운 목소리를 기부해 주셨습니다. 즐감하세요! 제 취미인 '짜장면(어쩔 땐 '짜장밥') 만들기'의 실체가 공개됩니다.


[마지막 목소리 입히기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나까PD'님과 '불의검'님]







제 취미가 바로 짜장면 만들기 입니다.
아무도 믿지를 않아 인증샷 준비했습니다.
호박,양파,파를 넣고 마구마구 볶는것부터 시작합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저의 비법은 하루 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크고 작은 시행착오끝에 완성된 저만의 요리법!
시행착오의 흔적들이 보이시죠?




짜장면 외에도 요새 부쩍 요리에 관심이 많아져서
이것저것 다양한 요리에 도전해보고 있습니다.
냉장고에 붙여놓은 요리법들. 모두 제가 손수 적어서 수정한 소중한 비법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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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해도 맛이 느껴지시죠?





우리 아들.
처음에는 많이 못먹더니, 이제는 없어서 못먹습니다!
이제부터 '문쉪'이라 불러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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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형은 학교를 졸업 후 취직을 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집에 작은 학원을 차려 밤에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빚도 갚아야 하고 어머니와 다섯 동생을 건사해야할 형의 임무는 막중했다. 나는 중학교를 들어가는 것보다는 검정고시를 통해 중학과정을 마치기로 했다. 검정고시를 패스하기 위해선 학원에 다녀야 했다. 하지만 형에게 학원비까지 손 벌릴 수는 없었다. 학원에 알아보니 그 학원은 특별 장학금이 있었다. 난 정말 죽어라고 공부했다. 결국 당시 수도학원의 전액 장학생이 되었다. 집에서 학원까지는 걸어 다녔다. 난 걷는 것이 좋았다. 걸어서 서울의 풍경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했다.






당시 형이 살던 동네는 와룡동이었다. 그곳은 전형적인 달동네였다. 미로처럼 좁다란 골목길, 그 길을 돌아 내려가면 세탁소와 이발소가 나왔다.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마당도 없이 바로 부엌과 이어졌다. 골목 모퉁이에는 시멘트로 만든 쓰레기통이 있었고 그 옆에는 어김없이 연탄재가 탑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후미진 어귀에는 퀴퀴한 지린내가 올라오고 간밤 어느 술꾼이 게워 낸 토설물이 말라붙어 세상의 시름을 증거하고 있었다.



난 그 동네가 좋았다. 사람이 사는 정겨움이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룡동은 아침이 이른 동네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참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 이었다.  주민 대부분은 극빈층으로 날품을 팔거나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서울에 와서 제일 이해가 가지 않았던 일이 바로 와룡동 사람들이었다. 왜 이처럼 부지런한 이렇게도 열심히 사는데 이들은 가난하게 살까? 난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울의 화려한 이면에 숨어 있는 이 사람들의 꿈은 무엇일까? 좀처럼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때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평생을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한국사회가 가진 구조적 모순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다. 단지 이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어린 눈으로 바라 본 와룡동 사람들. 열심히 일하고도 가난하게 산다면 그건 너무 불공평한 일이었다.



그 의문이 풀린 것은 큰형의 친구들 덕분이었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는 지금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형이 운영하던 학원에는 많은 친구와 후배들이 드나들었다. 암울한 시절 젊은 지식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술추렴 밖에 없었다. 큰형은 학원은 시국의 울분을 토해내는 아지트가 되었다. 난 형들이 술에 취해 뱉어 내는 울분을 통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깨우쳐가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유신최초의 시위였던 10.2 데모의 주동자도 있었으며 민청학련으로 쫓기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집은 그들의 도피처였으며 안식처였던 셈이다.



*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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